소공동 양복점 거리-왕년엔 대통령도 회장님도 단골손님

입력 : ㅣ 수정 : 1970-01-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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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유난히 고집하는 런던내기들,그들은 몸에 딱 맞는 양복을 고를 때 ‘세빌로가’를 찾는다.고급 맞춤양복점이 밀집해 있는 이 곳에는 ‘지브스&호크스’ 등 명품 브랜드가 즐비하다.서울의 세빌로가는 단연 소공동 양복점 거리다.시청앞 광장에서 남산3호터널 방향으로 난 5차로 양쪽에는 유럽풍의 고급스러운 실내장식으로 치장된 양복점 20여곳이 줄지어 있다.주문양복점 1번지인 소공로 거리다.한때 대통령을 비롯해 정·재계 실력자들이 단골손님이었던 소공로는 저렴한 기성복에 밀려 예전 같은 세(勢)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그러나 여전히 멋을 아는 사람들은 손으로 직접 만든 주문복의 맛을 찾아 이곳으로 향한다.

서울시청 광장에서 남산3호터널로 이어지는 소공동 맞춤양복점들.  이호정 기자

▲ 서울시청 광장에서 남산3호터널로 이어지는 소공동 맞춤양복점들. 이호정 기자

전문양복 20여곳은 즐비

조선 태종은 시집 가는 둘째딸 경정공주에게 집을 지어주며 아버지의 애틋한 정을 표시했다.사람들은 임금의 둘째딸이 살던 일대를 작은공주골 한자로는 소공주동(小公主洞)이라 불렀다.일제시대에는 필동에 모여 사는 총독부 고급관리들이 조선은행 샛길인 작은공주길로 출퇴근했다.소공로에는 이들을 상대로 양복점이 하나둘씩 생겼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소공로 양쪽에는 신축건물이 들어섰다.지금은 재개발지구로 묶여 쇠락했지만 당시엔 번화가였다.한국은행을 비롯해 은행원이나 사무직 직장인들을 주고객으로 흡수하는 양복점이 늘어났다.고객의 성향 탓일까.소공동은 종로나 충무로 등 다른 양복거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가 제품을 팔았다.3,4공화국 때는 국민복이 등장해 잠시 추춤했지만 70년대까지 소공로 맞춤 양복점은 전성기를 구가했다.웬만한 중소기업보다 매출이 높았고 재단사 보조라도 하려는 젊은이들이 넘쳤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세기양복점에서,김대중 전 대통령은 잉글랜드양복점에서 양복을 즐겨 맞췄다고 한다.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과 현대 정주영 창업주는 해창양복점의 오랜 단골손님이었다.

사라지는 맞춤 양복

“체구만 쓱 훑어봐도 치수가 눈앞에 그려집니다.”

해창양복점 한창남씨가 양복을 재단하고 있다

▲ 해창양복점 한창남씨가 양복을 재단하고 있다



35년째 양복을 지어온 김용화(50)씨는 소공동의 베테랑 재단사다.양복에 관해서는 공중전까지 다 겪었다는 김씨는 옛 시절에 대한 향수로 가득하다.명절이면 기업들이 수백벌씩 선물용 양복표를 주문해 고향에 내려가기조차 힘들 정도였다.한달에 수백벌씩 지었는데 요새는 10벌 주문받기도 힘들다.

소공동에서 맞춤 양복 한 벌 값은 120만원선.물론 재단사의 기술이나 양복감,공정과정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다.수제품 양복 한 벌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1주일 정도.물리적인 시간은 2∼3일 정도지만 다음 공정으로 넘어가기 전에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형태가 찌그러지지 않는다.

1958년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가업을 이어받아 40여년째 해창양복점을 운영하는 이순신(68)씨는 “주문복은 2만 5000번을 꿰매야 한 벌이 완성되는 인고의 과정”이라면서 “재단기술은 10년 이상 배워야 한 사람의 몫을 겨우 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

1993년부터 노동부가 뽑은 대한민국 기능명장에 소공로는 3명을 배출했다.‘라이프’의 박종오씨와 ‘홍균’의 이홍균씨,‘프라자’의 하석근씨.하지만 이런 장인들의 노고를 얼마만큼이나 이어갈지는 의문이다.명문대 학벌을 내던지고 재단사의 길을 자청했던 이씨는 “내 아들마저도 기성복 시장에 뛰어들었다.”면서 “맞춤복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조형예술품인데,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며 아쉬워했다.

이유종기자 bell@˝
2004-02-06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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